1인분의 삶
엉망진창이어도
꼭 살아있자 우리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2017
2023/06/07

 

그런 영화가 있다.

기억되기보단 각인되는 영화가. 불현듯이 들이닥쳐 한 시절이 되어버리는. 작년 7월, 예고편에 마음을 뺏긴 후로 한참을 아른대더니 결국 엔딩 크레딧을 보며 직감했다. 아, 이 영화가 그렇겠구나. 내 여름은 이 영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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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surpateur(The usurper). "침입자다." 엘리오의 첫 마디였다. 처음 듣는 억양과 처음 보는 얼굴을 하곤 당당히 쳐들어온 저의 침입자. 이름을 알려주고 악수를 하고 적당한 인사치레가 이어진 후 죽은 듯이 잠든 등을 바라보면서는 더 알고 싶은 사람이었을 거고. 그런 중에 "Later", 이 말은 꼭 벽 같지 않았을까. 조금 다가가려 해도 금방 "나중에" 하곤 세워지는 벽. 항상 몇 발자국 벌어지는 거리와 저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양 멀어지는 시선들.

 

빈정은 상할대로 상했는데 갑자기 다가와선 어깨를 주무르지를 않나, 또 그러곤 언제 같이 "Later."

 

"지내다 보면 싫어지면요." 돌이키면 심통이자 관심받고 싶단 투정이었다. 하지만 인정하기는 싫고 그래서 밤잠까지 설쳐대지만, 어쩌자고 '너'는 눈치마저 더럽게 없는지. 같은 알레르기일지도 모르겠다는 말. 우리 둘이 수영하러 가자는 얘기. 이제 와서 친한 척하는 그 얼굴이 꼴 보기 싫었을 거다. 아니, 실상 더 마음에 안 드는 건 자존심도 없이 따라나선다 한 제 진심이었겠다. 그러니 고작 함께 수영장에 와놓고는 악보를 보고, 들려달란 피아노는 못 들은 척 바꿔댔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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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사랑만큼 속수무책이 있나. 우두커니 앉아있기에는 애간장이 타고 책을 펼쳐 읽어본들 그 목소린데. 빈방 앞을 서성이다가도 지레 찔리고 인기척 하나에도 심장부터 내달리는데. 제 감정을 제대로 자각한 뒤 엘리오는 "아셨으면 하니까요." 한 마디로 맘을 던진다. '말하는 게 나을지 죽는 게 더 나을지'를 고민하던 소설 속 기사보단 퍽 단호하게. 날 것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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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을 열고 넘어가는 일. 방문이 닫히고 넘어서는 일. "와줘서 기뻐." 손을 잡는 일. 뒤를 내준 채로 걸어가는 일. 앞을 내준 채로 따라가는 일. 머리를 대고, 어깨를 물고, 발끝으로 장난치다 "괜찮아요." 끄덕이는 일. 안겨드는 일. 숨을 섞는 일. 몸과 몸을 겹치는 일. 그렇게 '하나'되는 일. 영화의 제목인 대사는 이쯤에서 등장한다. "Call me by your name. I'll call you by m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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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가시면 좋겠어요."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란 이토록 한정적이다. 미련해질 수밖에는 없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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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꿨다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문은 쉽사리 닫히고 기차는 칼같이 떠난다. 덩그런한 추억들만 남는 것이다. 어느 방향으로든 쉽사리 길을 잃는다. 빈자리가 유독스레 커서. 하필 당신이 쓴 그 방이 내 방이라서. 비는 쏟아질 듯이 오고, 입맛이 없어서.

 

"정말 생각도 못 한순간에 세상은 우리의 약점을 교묘하게 찾아내지. 그저 내가 있다는 걸 기억해주렴. 지금은 아무 감정도 느끼고 싶지 않겠지. 다시는 어떤 감정도 느끼고 싶지 않다거나. 그리고 나와 나누고 싶지 않은 얘기일지도 모르지만, 네가 가졌던 감정을 느꼈으면 좋겠다. 너희 우정은 정말 아름다웠어. 우정 이상이었지.

 

상처를 빨리 아물게 하려고 마음을 잔뜩 떼어 내다간 서른쯤 되었을 땐 남는 게 없단다. 그럼 새로운 인연에게 내어줄 게 없지. 그런데 아프기 싫어서 그 모든 감정을 버리겠다고? 너무 큰 낭비지.

어떻게 살든 네 소관이지만 이것만 명심하렴. 우리 몸과 마음은 단 한 번 주어진단다. 그런데 너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닳아 해지고 몸도 그렇게 되지. 아무도 바라봐 주지 않는 시점이 오고, 다가오는 이들이 훨씬 적어진단다. 지금의 그 슬픔 그 괴로움 모두 간직하렴. 네가 느꼈던 기쁨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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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ISPERING) Elio. Elio. Elio. Elio. Elio. Elio…."

"(WHISPERS) Oliver…. (OLIVER SIGHING OVER PHONE) I remever every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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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씬에서부터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까지, 화면을 차지하는 건 엘리오의 얼굴이다. 화로 앞에 웅크린 채 우는 듯이 웃는 얼굴. 누군가 다시 "엘리오"라 불러주기 전까지. 바람소리로만 빈자리가 채워지기 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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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시간은 꼭 영원 같다. 그대로 박혀버려 흘러가지 않는다.

 

p.s. 2018년 작성